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여요전쟁 (문단 편집) === 거란과의 일시적인 화평 ===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에서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동지사, 생신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 유지에 노력하였다. 거란군은 명목상 고려 왕의 친조를 약속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이익은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와 송의 군사적 연합을 저지하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친조를 다시 한 번 약속하였으나, 끝내 친조하지는 않았다.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서북 지방이 초토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거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장족(귀족)과 병졸, 수레도 돌아간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 태반이 전몰하면서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결원을 보충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출처: 속자치통감장편 74권 대중상부 1010년 11월.]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수많은 여진 난민이 발생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내지에 집단 이주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기록을 보면 직역상 [[천민]]으로 된 것 같다.[* 이들이 이후에 양수척(=화척), 진척, 재인 등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양인이지만 호적에 등재되지 못하고 차별을 받던 이들은 이후 몽골이 침입할 때 길잡이 노릇을 하는 등 몽골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된다.] 고려 현종은 정치적 부담이던 강조가 없어졌고, 피난 행렬을 함께 한 것으로 충성이 입증된 신하들도 얻게 되었다. 어가를 끝까지 호종한 채충순에겐 식읍 300호를 주었다.[* 출처: 고려사 93권 열전 6권 제신 채충순. [[http://db.history.go.kr/id/kr_093r_0010_0090_0020|#]]] 1등 공신 지채문에게는 토지 30결을 하사하며 교서로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하였다.[* 출처: 고려사절요 현종 2년 2월 미상(음) [[http://db.history.go.kr/id/kj_003r_0010_0030_0020_0030||#]], 고려사 94권 열전 7권 제신(諸臣) 지채문 [[http://db.history.go.kr/id/kr_094r_0010_0070_003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